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4년 주사파 파동 (문단 편집) == 발단 == [[남북정상회담]]을 앞둔 1994년 7월 8일에 [[북한]]의 [[김일성]]이 [[김일성/사망|죽자]] 7월 11일에 [[이부영]] 등 몇몇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 외무통일위원회에서 김일성 장례식에 조문사절단을 파견하려는 문제를 거론했는데 우파 언론들은 이를 비난했다. 특히 [[조선일보]]는 7월 13일자 기자수첩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94071300239102013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7-13&officeId=00023&pageNo=2&printNo=22742&publishType=00010|<속 조문 사절론>]]을 통해 일부 의원들의 조문사절론을 "주체사상을 콧잔등에 바르고 다니면서 어른들의 속을 썩히는 일부 철없는 풋나기 학생들과 동열에 서는 것"이라고 평가했고 사설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aver?articleId=1994071300239103005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94-07-13&officeId=00023&pageNo=3&printNo=22742&publishType=00010|<조문 의원들의 경우>]]에선 "그건 다음 선거 때 이들을 뽑은 선거구 유권자들의 몫"이라고 주장했다. [[김영삼]] 대통령의 태도 역시 한결같았다. 김영삼은 "어떤 형식의 조의 표현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간주해 처벌하겠다"고 엄포를 놓았다. 당초 김영삼은 "남북정상회담의 합의 원칙은 유효하다"는 입장을 보였다가 불과 며칠 뒤 "북한의 상황은 대단히 불안하고 김정일이 권력을 확실히 승계할지도 불확실하다"고 입장을 바꾸었다. 이러한 태도는 [[남북관계]]에도 영향을 미쳐 북한은 7월 15일부터 대남 비방방송을 재개하고 남한과의 공식적인 전화통화까지 거부해 남북관계가 다시 냉랭해졌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